1. 타국의 언어로 이뤄진 풍경

미즈노 루리코의 <헨젤과 그레텔의 섬>은 내가 오랫동안 좋아해 온 시집들 중 한 권이다. 고등학생 때 이 책을 처음 접하고, 오래 기억하고 있다가 누군가 미즈노 루리코에 대해서 물어오거나 말해주면 격하게 반응했다. 위의 이미지는 개정판의 표지다. 몇 년 동안 절판되어 있던 시집이 2022년에 개정되어 다시 출간되어 이제는 모두에게 편안히 이 책을 추천할 수 있게 되었다.
2. 시인 미즈노 루리코와 번역가 정수윤에 대해서
미즈노 루리코는 1932년 도쿄에서 태어나 동화를 번역하는 작업을 하기도 하고, 작사도 하는 등 문학과 시와 밀접한 작업을 꾸준히 해 왔다. 1977년 <동물도감>을 출간했고, 1983년에 두 번째 시집인 <헨젤과 그레텔의 섬>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83년에 출간되다니, 이 책을 읽게 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마치 나와 동일한 시대에 쓰였다고 하더라도 놀랍지 않을 만큼 세련된 문장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는 표제작이기도 한 '헨젤과 그레텔의 섬'이다.
<헨젤과 그레텔의 섬>은 정수윤 번역가를 알게 해 준 시집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정수윤의 번역 도서는 미야자와 겐지의 <봄과 아수라>, 이바라기 노리코의 <처음 가는 마을>이 있다. 외국 시집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번역이라는 장벽이 있기 때문인데, 정수윤의 번역은 원문을 읽는 것만큼 충만한 마음이 들게 한다. 다채로운 단어들이 내게 익숙한 문법으로 낯설게 쏟아들어온다. 지금 살펴보니 이상일 감독의 신작 영화인 <유랑의 달>의 원작인 나기라 유의 장편 소설 <유랑의 달> 역시 정수윤 번역가가 번역한 작품이다. 사가와 치카의 <계절의 모노클>과 요시야 노부코의 <물망초> 역시 궁금해서 조만간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나는 항상 번역가의 역할에 비해 한국 문단이 번역가를 크게 조망하지 않는다고 느껴왔다. 인터넷 서점이나 오프라인 서점에서 번역가의 번역본 기획전 같은 것이 열려도 재미있을 것 같다. 편집자가 편집한 책들에 대한 라인업을 살펴보는 기획전 역시 항상 기다리고 있다. 번역이나 편집이나 직접 책을 쓰는 저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없다면 나는 이 책을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 역시 독자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3. '헨젤과 그레텔의 섬'을 함께 읽으며
시를 이곳에 전문 수록하게 된다면, 시집을 사서 처음 펼쳐볼 때의 충격을 앗아가게 되는 것이므로 이 시를 나만의 방식으로 해설해 당신에게 들려주려고 한다. 이 시는 태평양전쟁 후 세상을 뜬 시인의 오빠와 그 여동생인 시인과 그림 형제의 동화인 <헨젤과 그레텔>이 포개어지면서 탄생한 시다. 어떤 시는 첫 연에서 시작되어 마지막 연에 다다라 마침표가 찍혀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었음에도 쉽게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는 시집에 실린 여러 편의 연작시로 몸집을 부풀린다. 그럼에도 내게 가장 좋았던 시는 역시 첫 시작인 '헨젤과 그레텔의 섬'이다.
"그것은 작고 투명한 유리잔 같은 여름이었다 그런 여름을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부르는 듯했다"
-미즈노 루리코, 헨젤과 그레텔의 섬, 마지막 문장.
두 남매는 여름의 섬에서 단둘이 살아가고, 그들의 현관문에 다른 집과 구별할 수 없도록 X표가 그어져 있다. 화자는 코끼리가 섬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본다. 오빠 역시 오빠만의 섬을 계속해서 상상한다. 그들은 각자의 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의 세계와는 조금 다른 곳에 놓여져 있는 섬은 어쩌면 현실의 집보다도 더 안전하고, 그들을 보호한다. 화자는 코끼리에게, 오빠는 섬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시를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그들이 전쟁터 한복판에 처해 있다는 상황을 알게 된다. 부모가 죽어가고 사랑하는 것들이 죽어가는 풍경을 도무지 믿고 싶지 않아 그들은 그들만의 섬을 상상한다. 어른들이 자처한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그들은 무고한 피해자다. 화자는 물고기 한 마리를 구해주고, 그의 배 속에 들어있는 지도를 발견한다. 그럼에도 화자는 끝내 그 지도로 부뚜막 속 마녀를 찾아간다. 빵 부스러기나 조약돌 없이도 그는 그곳으로 찾아갈 수 있고, 그의 죽음을 확인한다. 짧은 여름이었고 누군가는 여전히 살아남아 그 시절을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전쟁 속에서도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연약히 남아있는 시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나만의 해석을 적으며 시를 다시 읽으니, 이전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시가 좋은 이유는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여백이 있기 때문이다. 시를 읽을 때마다 다른 게 보이는 것은 시의 특성이기도 해서, 시가 좋은 이유 역시 생각할 때마다 매번 바뀐다. 이곳에서 더 많은 시집을 추천할 수 있었으면, 그로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시집을 읽게 된다면 좋겠다.
'책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세이/과학]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곰출판 (0) | 2023.02.23 |
---|---|
[시] 그 여자 이름이 나하고 같아, 이영주, 아침달 (0) | 2023.02.18 |
[만화] 서양골동양과자점, 요시나가 후미, 서울미디어코믹스 (0) | 2023.02.14 |
[소설] 이중 작가 초롱, 이미상, 문학동네 (0) | 2023.02.10 |
[소설]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박솔뫼, 스위밍꿀 (0) | 2023.02.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