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 소개 : <H마트에서 울다>를 다시 떠올리며

어젯밤 잠이 오지 않길래, 며칠 내내 즐겁게 보았던 드라마 <석세션>과 관련된 인터뷰를 찾다가 더 뉴요커에 접속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글이 구독해야만 읽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내가 찾던 제레미 스트롱의 인터뷰*는 무료로 읽을 수 있었다. 친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더 뉴요커의 장점은, 몇몇의 기다란 인터뷰 기사들을 양질의 낭독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언론사도 이런 낭독 파일을 실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돈된 목소리의 성우(혹은 배우)가 빠른 속도로 읽어 나가는 원고를 들으며 잠에 솔솔 들까 말까 했는데, 문득 더 뉴요커에 있는 다른 기사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더 뉴요커 홈페이지에서 'CRYING IN H MART' 카테고리를 발견했다.
(*<H마트에서 울다>와는 전혀 무관한 제레미 스트롱의 인터뷰. 조만간 이곳에 석세션 리뷰도 올릴 것이다!)
On “Succession,” Jeremy Strong Doesn’t Get the Joke
“I take him as seriously as I take my own life,” he says of his character, Kendall Roy.
www.newyorker.com
미셸 자우너의 에세이 <H마트에서 울다>는 더 뉴요커에서 연재된 원고다. 작년 여름의 나는 이 책을 괌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날 비행기에서 훌쩍대며 읽었다. 미셸 자우너는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에세이스트일 뿐만 아니라 본업은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가수다. 2022년 한국의 락 페스티벌인 펜타포트에 와서 내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에세이를 완독 후 이 영상을 찾아보게 되었다. 어쩌면 그녀에게 가장 익숙할 언어인 음악으로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펑펑 울었던 이유는, 이 책이 암 투병으로 사망한 어머니를 기리는 에세이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거대한 슬픔과 싸웠던 미셸 자우너의 청소년기가 함께 들어있기 때문이다. 내가 평소에 에세이를 잘 읽지 않는 이유는, 작가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면만 선택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내가 내가 쓰는 주인공이 되어버리면, 인물과 인간의 어긋남이 커다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셸은 용기있게도 자신이 성장한 도시와 사람들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엄마와 사소한 것들로 싸웠던 자신의 유년기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우리는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엄마와 함께 H마트에 가서 한국의 식료품을 사서 돌아왔던 일화와 엄마를 떠나보내고 혼자 H마트에 갈 때마다 운다고 고백하는 미셸 자우너의 일화를 겹쳐보며 생의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2. 밑줄 긋기
"너의 10퍼센트는 따로 남겨두어라." 누군가를 아무리 깊이 사랑하더라도, 혹은 깊이 사랑받는다고 믿더라도 절대 네 전부를 내주어서는 안 된다. 항상 10퍼센트는 남겨두어라. 네 자신이 언제든 기댈 곳이 있도록. "나도 네 아빠에게 내 맘을 온전히 다 내어주진 않는단다." 엄마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미셸이 엄마와 얼마나 솔직한 관계를 맺었는지, 그렇기에 힘들었을 테고 또 그렇기에 몸속에 기쁨이 얼마나 생생히 남아 있을지 상상하게 되었다.
한국 엄마들은 서로를 자기 아이의 이름으로 불렀다. 이를테면 지연의 엄마는 지연 엄마라고, 에스터의 엄마는 에스터 엄마라고 불렀다. 나는 그분들의 진짜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 자신의 정체성이 자기 아이들에게 흡수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H마트에 가는 것은 갑오징어나 세 단에 1달러짜리 파를 사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두 분에 대한 추억을 찾으러 가는 것이기도 하다. 두 분은 돌아가셨어도, 내 정체성의 절반인 한국인이 죽어버린 건 아니라는 증거를 찾으려는 것이다. 그런 내게 H마트는 도무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기억, 항암치료로 인해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뼈만 남은 엄마의 몸과 하이드로코돈 복용량을 기록하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대신 두 분이 그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떠올리게 해준다. 아름답고 활기차던 모습, 고리 모양의 달콤한 짱구 과자를 열 손가락에 끼고 흔들어대던 모습, 한국 포도를 먹을 때 껍질에서 알맹이만 쪽 빨아먹고 씨를 훅 뱉는 법을 내게 가르쳐주던 모습을.
<H마트에서 울다>의 또 다른 재미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친밀한 한국의 풍경을 외부인이자 내부인인 미셸의 시선으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미셸은 엄마로부터 한국의 식문화를 접하고, 한국에 놀러가 친척들과 부산에 가고 제주도에도 간다. 우리가 먹은 음식이 우리를 이루는 일부라는 점은 너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음식' 그 자체만이 우리의 일부는 아니다. 어떤 음식을 어디서 사 먹었는지, 어떤 길을 걷다가 어떤 상황에서 그것을 먹었는지, 누구와 함께 했는지, 직접 만들어 먹었는지 누군가 나를 위해 정성스레 만들어주었는지와 같은 서려있는 기억까지도 우리의 일부가 된다. 미셸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괌 여행 마지막 날에 들렀던 아이홉에서 팬케이크를 시켜 먹었었는데,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읽은 이 책에서 어린 미셸 자우너가 아이홉의 커피와 해시 브라운 감자를 먹으며 방황 중인 것을 보며 독서의 우연한 기쁨을 느꼈다. 나는 이런 순간과 마주치기 위해 책을 읽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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